은둔 수도승
이집트는 비옥한 옥토와 메마른 사막으로 나뉜다. 생명의 신 오시리스와 호루스가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사막은 악의 신 셋(seth)이 외진 데로 쫓겨나 모래를 씹으며 산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 악령의 발원지 버려진 땅에 예수를 구주로 모신 수도승들이 들어가 기도와 노동으로 살아가는 수도생활을 연 것은 주후 3백년 경이었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게 압바(스승)를 한명씩 두었고, 그 자신도 대를 이어 압바가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막 교부다. 이들은 독(獨)수도승 곧 모나코스(Monachos)라 불렸는데, 정혼하지 않은 독신자라기보다는 스스로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고, 무섭기까지 한 절대 고독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급진적인 구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동굴과 천막에 터를 잡아 살았으며 더운 낮에는 인도의 자이나교 수도승처럼 벌거벗고 지냈다. 긴 옷인 투니카는 한 번도 빨지 않고 누더기가 될 때까지 걸치고 다녔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한 벌의 투니카 말고는 어떤 옷도 지니지 말라 부탁했다. 그런데 밤이면 혹독하게 추운 이집트에선 한 벌 가지고는 버티기 어려워 두벌씩은 장만하고 살았다. 그 중 괜찮은 옷은 성례전에 참여하려고 교회에 갈 때나 입고 나갔다. 한 수도승이 교회 앞에서 알거지를 만나자 냉큼 투니카를 벗어주었다. 주교는 수도승에게 “거지에겐 낡고 헤진 투니카를 주지 그랬습니까. 멀쩡한 외출용 투니카를 주다니 아깝네요.” 그러자 수도승은 “예수님에게 어떻게 헌 투니카를 줍니까.” 딱잘라 대답했다.
그들 수도승들은 “걱정을 하는 것이야말로 걱정이다”며 마음이 헝클어지지 않게 부단히 다스렸다. 그러나 그들도 걱정이 없을 수 없었으니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악령이 골칫거리였다. 절대고독의 삶 속에서 신비한 환상을 수시로 보았다. 어떤 때는 묘령의 여자가 나타나 유혹을 하기도 하고, 당나귀를 탄 미소년도 나타났다. 가장 햇볕이 맹렬한 정오에 보통 그들은 환시 환청에 시달렸는데 그래서 ‘정오의 악령’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악령은 독수도승을 큰 적으로 여겨 수도승의 사막행을 포기하게 하려고 온갖 힘을 다했다.
수도승이 사막에 오면 악령은 그를 세상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애썼다. 은수자를 독방에서 내보내는 것 자체가 이미 악령의 승리다. 이를 위해 악령은 온갖 간계와 폭력을 다 동원하다. 손을 끌어서라도 수도승을 밖으로 내보낸다. 악령들은 개, 곰, 표범, 황소, 늑대, 말, 당나귀, 뱀, 도마뱀 전갈 등 온갖 짐승들로 위장한다. 압바 모세 수사는 물을 긷다가 허리에 몽둥이 세례를 받아 일년동안 앓아누웠다. 리코폴리스의 요한 수사는 사흘동안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거의 죽을 뻔했다. 수도승의 사지와 옆구리를 만지고 귀를 후비며 콧구멍을 간지럽힌다. 위를 차게 하거나 태워버리고 입으로 들어가 하품하게 만들며 눈꺼풀에 내려앉아 졸음에 빠지게 한다. 탐심과 탐욕, 음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영적 태만과 무기력), 헛된 영광, 교만이라는 악한 생각들을 품게 한다.” (뤼시앵 레뇨/ 사막교부, 이렇게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수도원과 멀리 떨어진 독방 암자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압바 모세는 “독방에 머무시오, 독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오.”라고 제자들을 독려했다. 손노동, 한 끼 식사, 기도, 침묵, 성서 묵상이 전부인 단순한 일상을 고집했다. 잠자는 것이 죄스러워 수도승은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잤는데, 수호천사와 악령이 번갈아가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항상 아침에 깨어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누가복음 18, 13)
어떤 수도승은 성지 이스라엘 땅까지 오직 맨발로만 왕복 순례하기도 하고, 악기를 들고 여행자가 되어 떠돌면서 주님을 따르는 삶의 고달픔과 기쁨까지를 가락에 담아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들 한 마음으로 고행과 기도로서 은수자의 삶을 무난히 살아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우들에게서 이런 은둔 유랑 수도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 너도나도 두더지 게임처럼 얼굴을 내밀고 싶어 안달하고, 한자리 꿰차서 떵떵거리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교권을 쥐거나 돈줄을 쥐면 절대 놓을 생각도 나눌 생각도 않는다. 은둔자는 희귀한 천연기념물이고 대개들 너저분한 텔레비전의 연예인처럼 요란하고 경박스럽다.
처처에 지진 소문
뼈만 남은 매운탕의 우럭 눈알같이 창백한 눈들이 도심에 가득하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간이란 보다 많은 물질의 생산과 소비를 창출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율성까지도 잔인하게 통제하는 감옥소렷다. 이런 억압적인 쇠고랑줄을 풀고 새처럼 놓여나서 대자연 속에 호젓함을 누리고 싶다. 이웃의 웅크린 소식들엔 흥건한 습기로 답하며 노래도 부르면서 말이다. 편두통이 몰려오면 눈치 볼 것 없이 벽에 물구나무를 서기도 한다면 참말 좋으련만... 그런 여유를 바라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한적한 바닷가 어촌마을... 많은 여행자들이 찾던 갈매기 우는 마을에 그만 거대한 쓰나미 해일이 덮쳐버린 것이다. 죽음은 정전처럼 어두운 현실. 땅이 꺼지는 지진과 물난리와 사랑하는 가족과의 갑작스런 작별마다 안타깝구나.
구구단을 다 외웠는지 선생님 앞에 혼자 설 때도 이처럼 캄캄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수십미터 집채만한 해일이 덮치고 대지진으로 건물들이 캄캄하게 쓰러졌다. 정답이 불시의 죽음인 목숨들은 안타깝고 쓸쓸하다. 이를 도화선으로 연이은 원전 참사와 방사능 피폭, 시방 일본 열도는 물론 온세계가 두두물물 경악과 비통의 나날들이다. 방사능 찌꺼기는 날쌘 구름을 타고 아예 초록별 전체를 잿빛으로 뒤덮을 기세다. 아직 여행자도 디뎌보지 못한 해안선 마을은 하늘로 피난 갔던 갈매기가 몇 마리 돌아와 울고 있겠구나. 영원히 그 아름다웠을 마을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으리라. 한갓진 시골마을에 갈 곳 없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밤마다 서성거릴 것이다. 울먹울먹 봄눈에 다시 젖고, 눈시울도 따라서 젖어드는 그곳 사람들. 소주잔 정답던 이웃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부스럼딱지 같던 가난을 같이 이겨냈던 어부들과 고향 친구들, 동창생들, 모두모두 어떤 다른 밤낮으로 길을 떠났단 말인가. 좌절이나 부적응을 같이 극복해왔던 이웃들.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의 내력은 손발에 쓰여있는데, 그 손을 맞잡으며 다시한번 울고 웃으면서 벅찬 꿈을 키워왔을 어촌 사람들...
소설가 월리엄 포크너는 “세상의 모든 죽음이란 가족의 고통”이라고 일찍이 말했다. 어쩌면 여인들이 예수를 사랑하고, 내 아들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승화시키는 것은 그의 죽음을 가족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대도 시방 나처럼 가족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이 대참사를 마주하고 있는가. 엄청난 파국이나 재앙은 오히려 일상에서 쉽게 용해되고 망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일상을 찾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 노력, 주위의 따뜻한 관심과 도움이 절실하겠다.
성서에는 네 번의 지진이 나타난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어슬렁어슬렁 움직이자 지진이 일어났다. “야웨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야웨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웨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웨께서는 지진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열왕기상 19, 11-12) 또한 아모스(암 1, 1)와 스가랴(슥 14, 5) 시대에도 지진이 있었다. 예수 부활 때에는 갑자기 진동하는 지진으로 군중들이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마태 28, 2),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날 때도 지진이 일어났다.(행 16, 26) “그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을 기초부터 온통 뒤흔들어 놓는 바람에 문이 모두 열리고 죄수들을 묶어 두었던 쇠사슬이 다 풀리고 말았다.”
이사야서에서는 지진이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이라고 기술 되었는데(이사야 29, 6), 그 밖에는 모두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은혜가 내리기 직전 서막삼아 일어난 자연재해였다.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저주로 연결하여 읽는 사람들과는 상식적인 대화를 더이상 나눌 수 없다. 성서를 그런 관점에서 이용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재앙이나 고통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무척 궁금하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로 셈해볼 때 지진은 한순간 찰나의 날벼락. 그러니 그대 용감하게 다시 일어나 긴 날토록 누릴 평온을 가꾸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재건의 깃발을 늠름하게 치켜들어야 한다. 문제라면 이번 일본 동북부 대지진에서 겪었던 것처럼, 핵물질을 이용한 원자력 발전이라는 괴물이다. 이미 우리 곁에 시뻘건 재앙으로 닥친 이 난리사단 물질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세계가 반핵을 결심하면서 공동선을 위한 불편함과 자발적 가난을 각오한 뒤에야 인류의 미래는 비로소 밝아오겠다.
설탕인가 소금인가
시인은 지구별을 소금별이라 불렀다. 바다가 소금 알갱이를 품고 있고, 짭쪼름한 맛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은 음식의 간을 맞추는 것은 물론이고 염분을 섭취하여 육신의 건강을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하늘의 선물이다. 그래 로마 시대엔 군인들에게 소금으로 월급을 주기도 했다. 이를 ‘쌀라리움’이라고 하는데, 소금(sal=salt)을 월급으로 타는 사람이란 뜻이다. 지금도 ‘샐러리맨’이라는, 월급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
대머리에 못난이로 놀림 받고 살던 예언자 엘리사. 그의 첫 번째 기적사건에 소금이 등장한다. 유순한 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와 성읍에 접어들었을 때 “수질이 좋지 않아서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아 키울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예언자님!” 애나 어른이나 대머리 못난이라고 놀리다가 살기 힘들 때가 되면 꼭 예언자를 찾는 성읍 사람들. 그래도 연민에 모른 척 할 수 없어 엘리사는 소금 한 그릇을 들고 샘터에 가서 뿌리며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정하게 하리라.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아이를 유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열왕기하 2, 19-22) 이후로 거짓말처럼 샘은 깨끗한 일급수를 콸콸 쏟아냈다. 이러한 얘기처럼 구약시대부터 소금은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소생시키는 정화의 상징으로 쓰였다.
가톨릭교회에서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세례식 때마다 사제가 작은 양의 소금을 아이의 혀 위에 뿌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혜의 소금을 받아라. 이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너를 정화시키리라.” 이는 아마도 로마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민간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로마에선 태어난 지 8일 되는 아이의 입술에 소금을 밀어 넣어 악령을 내쫒는 의식이 전해 내려온다.
북미 원주민들은 치료약을 ‘음페손’이라고 불렀다. 그중에 한 가지, 사막에서 얻은 ‘석염’ 소금은 약재로 쓰였는데, 무당이 환자에게 소금 한 숟갈을 뿌리거나 소금물을 끼얹어 정화와 건강을 기원했다. 소금을 얻으면 아끼는 항아리에 담아 귀하게 썼다. 자연 속에서 꿀을 얻는 것보다 소금을 얻는 것을 더 감사하게 여겼다.
롯의 부인이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이야기(창 19, 26)는 정화를 넘어 심판의 상징으로도 쓰였음을 보여준다. 당시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을 가리켜 소금 기둥이라고 불렀는데, 롯의 부인이 집안의 대를 잇지 못했음을 이처럼 기술했음이리라. 물에 녹아 스며들지 않고 생뚱맞게 우두커니 서 있는 소금 기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오만한 인간상을 대변한다.
아프리카 중부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사는 소설가 ‘암마 다르코’는 여든 살 이모할머니를 추억하면서 소금 이야기를 꺼내든다. 병상에 누워있던 할머니는 “다르코야! 맛없는 음식하고 약이 효과가 있었다면 나는 재미가 없어서 아마 오래전에 죽었을 게다. 하지만 나는 다시 기쁘게 밥을 먹고 싶구나.” 다음날 다르코는 종이에 몰래 의사가 금지했던 소금을 싸갔다. 오직 소금으로 간을 맞춘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위해서 말이다. 다르코는 훗날 이런 말을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진기한 특성보다는 나는 아주 깊이 인간적인 어떤 것. 우리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그걸 이야기로 쓰고 싶었다, 내가 의사 몰래 할머니에게 가져갔던 한줌의 소금 같은 이야기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한때 반짝하니 설탕의 맛을 탐하다가도 결국은 소금에게 기울고야 만다. 소금의 필요는 소금이 없을 때면 대번에 알게 되는 것.
“나 죽으면/ 맛으로만 남아라/ 향기도 색깔도 모양도 버리고/ 오직 짜디짠 맛/ 정신으로만 남아라// 살아 내 먹장가슴은/ 나 죽으면/ 연꽃 눈부신/ 진흙 못이 되지 말고/ 향기 황홀한/
백합의 골짜기도 되지 말고// 삼복 타는 불볕 아래/ 비로소 살아나는 소금맛 하나로/ 결단코 썩지 않는/ 정신의 텃밭 되거라/ 한 뙈기 소금밭이 되거라.” (유안진, 소금밭)
소금의 정신을 간직하라고, 예수는 친구들을 소금이라(-되라) 불렀다. 맛을 잃은 세상에 간을 맞추고,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사명을 우리에게 맡겼다. 하지만 오늘날 제자요 성도라는 이들은 어떠한가. 소금보다는 설탕을 좋아하고, 소금보다는 설탕이 되려고 난리들이다. 짠맛의 땀과 눈물, 감내와 인내 보다는 쾌락과 열락의 웃음 곁에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을 괴롭혀 가며 전세 월세 건물 꼭대기만큼 올려 받아놓고서 감사기도를 바치는 인간들이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저도 교인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활개를 치며 다닌다. 세상의 짠맛이 아니라 단맛이 좋아 정신 줄을 내려놓은 한심한 인간들, 소금 한 숟갈씩 드셨으면 좋겠다.
십(十)계명과 십(十)자가
람세스 2세(BC 1290-1224)의 학정을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인들이 탈출을 감행 한 뒤, 아라비아 사막을 넘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자리 잡은 팔레스타인 평야를 내다보던 순간. 지도자 모세는 시나이와 호렙을 거쳐 신비로운 산정에올라 야웨와 맺은 계약을 돌판에 담아설랑 백성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 갈 곳 없던 그림자들조차 비로소 하나님의 신탁에 믿음직스러워 새옷을 갈아입은듯 명쾌하고 상쾌해질 수 있었다. 낯설고 불편한 상황들이 연속되던 유랑생활 아니었던가. 날마다 마주하는 사막의 모래물결주름에 그만 얼굴마다도 잔주름이 늘던 때... 발바닥 부르트도록 달려온 신발을 벗고 그들은 십계명의 돌판에 감격하면서 납작 엎드리었다.
이후 모세는 시나이에서 모압까지 남은 길을 무난히 이끈 뒤, 대장군 여호수아가 바통을 이어받아 가나안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 십계명 돌판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속은 물론이고 ‘신의 동행’을 상징하는 역할까지 하면서 승승장구를 이끌었다.
계약(Covenant)이라는 말을 딱히 다른 말로 바꾸기란 간단치 않다. 출애굽에서 광야생활, 가나안 진입 때까지 이스라엘 공동체는 야웨 하나님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다. 협정, 조약, 맹약, 동맹, 의무, 약정 이러한 말뜻을 모두를 모아놓은 큰 약속 ‘계약’은, 그들 히브리만의 독특한 나라를 이루는데 중요한 밑돌이었다. 시나이산과 호렙 산을 거쳐 완성된 계약의 중요 뼈대는 역시 모세가 들고 온 십계명이었다. (출애굽기 34, 신명기 5)
모세가 산마루에서 가져온 돌판 위에는 야웨에게서 받은 10가지 계명이 새겨져 있었고, 이는 또한 이렇게 윤리적인 해석을 끌어오게 되었다. 1. 다른 신을 예배하지 말 것.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도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신을 예배하라고 강요할 수 없음. 2. 신의 형상을 제작하지 말 것. 여기엔 야웨도 예외이지 않음. 3. 야웨 이름의 오용과 남용을 금지함. 주술과 미신 행위, 저주를 위해서 신의 이름을 사사로이 갖다 붙이지 말 것. 4. 일주일에 하루씩 안식일엔 노동 금지. 이는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착취로부터 노동자들을 지키고자 함. 5. 부모에 대한 저주와 원망 금지. 노부모를 비롯 지혜로운 연장자들을 공경하고 보호하여 사회를 영적으로 다짐. 6. 어떠한 경우라도 살인 금지. 원한에 의한 살인은 물론이고 살인자나 죽을 죄를 지은 중죄인이라도 법적 절차 없는 사형은 절대 금지. 7. 기혼자와 약혼자가 있는 사람과의 성관계 금지. 신의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유지를 위해. 8. 남의 소유물을 빼앗거나 사람을 유괴하거나 납치하는 일 금지. 남이 가진 개인 소유물을 비롯 부당하게 빼앗지 말 것과 유괴는 고대사회에서 중요한 노예 공급 방법이었는데 이를 엄금함. 9. 허위 고발 금지. 원고나 증인이 거짓으로 무고하는 것을 금하여 공명정대하고 반칙이 없는 사회를 꾀함. 10. 다른 집과 가계 구성원 및 재산 탈취 금지. 앞서 사람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탈취하는 것을 금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고, 권력자들의 고삐 풀린 행동을 제어함.
이 10가지 야웨의 명령(부탁)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종(수락)은 십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이를 강제하는 후속 법령이 곧바로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모세가 전한 이 계명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야웨 신앙 생활화의 기초가 되어주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주권이 개개인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애를 지닌 친구는 예외이겠으나 보통 사람들은 열 개의 손가락을 지녔다. 오무렸다 폈다 열 개의 손가락은 입과 혀와 눈빛 말고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십진법이라는 것도 열손가락에서 비롯되었다. 십계명에 앞서 10이라는 숫자가 등장하는 건 창세기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복을 빌어준 예루살렘의 왕 멜키세덱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을 쳐서 획득한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을 나눈 사건이 있다.(창 14) 당시 왕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제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제에게 대하는 극진한 마음을 보시어 15장엔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내려진다.
십계명은 귀찮은 금기와 금지의 잔소리가 아니라 결국엔 둥개둥개 춤추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하늘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한 시대 구약을 이끌던 약속이고, 영원한 약속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내려주시마라는 ‘결정적인 약속’이었다. 예수는 열십자 십(十)자가에 매달림으로 십(十)계명의 완성을 보여주었다. 이 새로운 계약 그러니까 믿음 소망 사랑의 하나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였음을 마치 모세가 돌판을 높이 치켜들 듯 온몸으로 만방에 선포하였다.
에클레시아라는 꽃밭
봄은 개화의 절기다. 꽃이 피지 않는 봄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수선화 피는 예수 탄생 예고, 핏빛 진달래의 수난절, 하얀 목련과 순정한 백합의 부활절, 민들레의 예수 승천과 성령 강림절은 갖가지 꽃들의 피어남으로 총총 연결되어 있다. 옛조선사람 허균은 무척이나 꽃을 사랑했던 모양이다. 하여 꽃꽂이에도 일가견을 가졌던가. “병에 꽃을 꽂아 책상머리에 놓는 데는 각각 알맞은 곳이 있다. 매화는 한겨울에도 굴하지 않으니 그 매화꽃을 몇 바퀴 돌면 시상이 떠오르고, 살구꽃은 봄에 아리땁게 피니 화장대에 가장 걸맞고, 배꽃은 비가 내리면 봄 처녀의 간장이 녹아내리고, 연꽃이 바람을 만나면 붉은 꽃잎이 벌어지며, 해당화와 복숭아꽃, 오얏꽃은 화려한 잔치마당에서 어여쁨을 다투고, 목단과 작약은 가무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꽃다운 계수나무 한 가지는 웃음을 짓기에 충분하고, 그윽한 난초 한 묶음은 이별하는 사람에게 줄 만하다.” 그런데 지금 내 방엔 매화꽃가지 꽃병에 담겨있다. 고운 향을 맡기도 하고 종종 꽃송이를 띄워 차를 마시기도 한다.
예수 복음이 활짝 꽃핀 건 교회렷다.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말은 회합, 집회를 의미하는데, 교회는 예수 복음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회합이며 집회다. 꽃밭처럼 가지가지 향기와 빛깔을 가진 꽃들이 한 주인을 모시고 한울타리에 모여 피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란 말이 로마의 정치 집회를 일컬었던 꾸리아(Curia)에서 나온 말이라 하여 멀리하고 ‘공동체’라는 말을 즐겨썼다고 한다. 취향이겠고, 공동체와 교회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 한뿌리인 게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 나라 바실레이아(Basileia)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정거장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순례길에 자리한 쉼터요 여행정보를 얻는 안내소다. 어떤 여행자는 한곳의 정거장만을 이용하기도 하고, 누구는 여러 정거장을 거치기도 하고 또는 무교회주의자들처럼 정거장 없이도 곧바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도 할 것이다.
외롭게 혼자서 피어 아름다운 꽃도 더러 있으리라. 그러나 꽃들이 서로 어울려 피어있는 에클레시아 꽃밭만큼 아름다울까.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교회라는 꽃밭을 일구었고, 교회라는 정거장에 곤한 몸을 뉘였다. 황혼의 천근만근인 다리를 펴기도 하고, 집 잃은 어린 아이는 이곳에서 눈물을 닦으며 나눠주는 빵을 달게 먹었다.
살아낼 수밖에 없는 삶, 낡고 비루하게 뒹구는 이 삶 안에서 그래도 교회는 웃음꽃 머금을 수 있는, 누구나 사람답게 대접받는 최후의 보루 아니겠는가. 어스름과 어둠이 반씩 몸을 섞을 무렵 그래도 꽃향기가 마당에 은은히 풍기나니 사방팔방 막힌 절망의 밤이 하나 두렵지가 않다. 몇몇 대형교회 관계자들은 이 소소하고 단아한 꽃밭인 작은 교회의 참맛을 모르는 것 같다. 신식으로 지어진 거대하고 웅장한 식물원, 엄청난 넓이와 갖가지 종류로 채워진 화원보다는 소박한 꽃밭일수록 잔잔하고 은근한 감동을 안겨주는 법이다.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 안 넓이는 사람이 쉰 명에서 백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마룻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00교회라는 간판도 안 붙이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옷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훔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 동화작가 권정생 아저씨는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이런 교회를 꿈꿨다. 아저씨는 또 밭을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군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라고도 했다.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실 것이라고... 맞다, 죄고만 꽃밭을 일구실 예수를 나도 생각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삶들이 길가다 잠깐 모여 신앙과 애정을 확인하는 곳, 그리고 여전히 순례중인 떠돌뱅이들의 반짝 거처다. 그러니 겨울산행의 불빛 깜박이는 산장처럼 단아한 건물이면 되었지 너무 큰돈을 들이부어 호화로운 건축에 매달릴 일이 아니다. 대형 대피소 방주는 대홍수 때나 필요한 것, 자고로 크게 벌려놓으면 크게 망하고 크게 사고치는 법. 크게 모이려고 애쓰지 말아라. 그대가 가꾼 작은 꽃밭의 행복처럼 그런 작고 따듯한 교회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욕심은 결국 화를 부르게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