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만 하루 쏙 빼고 산골은 다시 눈발이 휘루루 날린다. 한마디로 하느님 말발이 전혀 먹히지가 않는 시절 기운인가 봐. 아이들은 얼마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렸을까 말이다. “워메. 추와 죽겄네잉” 난로에 참나무 장작개비를 던지는 일은 선동렬 감독의 왕년보다도 정확하고 날렵한 솜씨렷다. 숯불 다리미를 쓸 때라면 좋겠는데 난로에 남아도는 게 숯덩이. 근간 눈사람 아저씨 찾아오시면 눈썹이나 붙여드려야지 하고 한쪽에 모아둔 것이 새까만 자루 여러 포대가 되었구나. 눈사람을 굴릴 만큼 찰진 눈은 아직까지 무소식이렷다. 겨우내 삼베, 무명, 명주를 길쌈하여 차곡차곡 쟁여두었을 벽장마다 텅 비어 바람소리만 웅웅 대는 동네 빈집들. 바람소리조차 빈집에서 깊은 시름이겠구나 싶어라.
내외지간 맘보춤으로 흥을 돋우던 방에 ‘말이 안통하네뜨’ 대통령이 테레비 상자 안에서 강경어조의 종북 타령을 반복 재반복 중이다, 그러면 종북 타령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들과 국회위원들이 일사분란 맘보춤을 추면서 우루루 떼로 몰려다니는 뉴스. “논 모를 낼 때나 밭 김을 맬 때나 아낙네 맘보가 들린다. 치마에 감기는 도라지 타령이 아낙네 맘보냐. 할아버지 담뱃대가 흔들흔들 이가 빠진 할머니도 헤이이 맘보. 아낙네도 맘보다 맘보시대다.” (반야월 가사/ 아낙네 맘보)
헤에이 맘보 하면서 나는 고들빼기김치를 꺼내어 늦은 저녁밥을 먹다가 난로 가에서 숭늉을 마시다가 음악을 좀 들었다가 책을 보았다가, 우루루 책과 찻잔들을 몰고 다니면서 이 방 저 방으로 맘보춤이렷다.
낮엔 부엌도 아니고 정제도 아닌 키친이라 써진 가게에서 친구랑 밥을 먹고 왔더니만 속이 다 울렁거려. 돌아오자마자 동치미 국물을 한 사발 들이켜야 했었다. 그때 먹다 남은 쪼가리 무를 죄다 베어 물고 보니 긴긴 겨울밤도 자정으로 드디어 저무는구나.
교회에서 살적엔 세밑이다 연초다 손님들 잦은 방문으로 자정이 뭐야 새벽까지 내달려야 했었다. 지금 생활은 고요는 고요인데 ‘한정이 없고요’쯤 이랄까. 조금 적적한 면도 없잖아 있으나 건강이 일단 많이 좋아졌다. 누굴 찾아가는 일도, 누가 찾아오는 일도 약속이 아니면 피하게 되다보니 정신 건강도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지난달 아주 오랜만에 강진 남녘교회엘 다녀왔다. 젊었던 시절, 십여년동안이나 연말연시를 보냈던 추억의 장소. 부모님 산소가 마침 교회 근처여서 해마다 찾아뵙지만, 교회 방문은 않는 것이 자립적 목회에 도움이 될거라 싶었다. 시골교회라 갈수록 오그라들고 쪼들리는 형편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야 하는 게 전임자 노릇이다. 아마 사오년만의 공식 방문이었을 것이다. 담양으로 길 떠난 다음, 그로부터 또 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라. 그 사이 남녘은 목사님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다가 작년 임시로 부임한 전도사가 반년 만에 시골목회 힘들다며 후다닥 짐을 싸는 바람에 지방회장 목사(가톨릭에선 주교)인 내가 이래저래 골치 아픈 수습절차를 마련해야 했었다.
새로 부임한 목사님은 평소 교류가 있는 선배여서 요쪽말로 이무롭고 살살한 마음이라 편안한 방문을 할 수 있었다. 성탄절 앞두고 예배당 전체 도색 작업과 쓰레기 청소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신학생들이 찾아와 함께한 봉사활동을 격려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거기 남녘에 해남 미황사에서 달아준 아기 교종이 반갑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년고찰 해남 미황사에 범종이 없다고, 늦었지만 범종 불사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어디서 주워 들었다. 교회도 죄고만 종이 있는데 천년고찰에 종이 없다니... 마침 성령강림주일 헌금이 있어 이십 몇만원인가 봉투에 담아 절집을 찾아갔다. 친구사이인 주지 스님은 두말 않고 헌금을 받으셨다. 이심전심 마음이 통한 것이다. 절집의 멧새나 교회당의 들새나 우는 목소리는 똑같고, 절집 범종이나 교회 교종이나 세상을 깨우는 목소리는 매 하나. 스님이랑 나랑 서로 빙긋이 미소만 머금었다.
남녘교회 교종은 종추가 오래되어 낡고 삵아 한동안 교종을 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종추를 하나 새로 구해 매달려고 올라갔는데 딱새 가족이 종 안에다가 살림을 차린 게 아닌가. 포기하고 또 내려와야 했다. 전문가 말을 들어보니 종추만 문제 있는 게 아니라 종 전체가 문제이니 치지 않는 게 좋겠다 해서 타종 없이 그냥 주일예배를 이어갔다. 있으나 마나한 교종, 심심한 목사와 심심한 종지기 할매들은 하늘로 솟구친 종탑을 하냥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었다.
범종 불사에 정성을 보탠 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였다. 금강스님이 지나는 길이라고 목사관에 불쑥 나타나셨다. “교회 종을 하나 달아 드릴테니까 아무 말 하지 마시고 받기만 하심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랍니까?” “엄마 종이 아기 종을 낳았다, 뭐 그렇게만 생각하면 되시는 겁니다.” 고장이 나서 치지 못하고 있던 교종, 그 교종을 하나 새로 달려면 상당한 돈이 드는 일인데... 염치없어서 허락할 수 없는, 과분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완강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진짜, 범종 만들고 남은 쇳물로 빚어 만든 아기 교종이 예배당 마당에 큰 사다리차와 함께 찾아온 것이었다. 스님과 불자들 몇 분은 교회에 종을 달아준 날도 계셨고, 첫 번 종치는 주일에도 찾아주시어 진심으로 축복해 주셨다.
미황사 범종 속을 살펴보면 남녘교회라는 글씨가 선명히 적혀있다.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겠고, 앞으로도 영원히 마지막일 거라 또한 짐작된다. 그 일로 나는 무척 괴로운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었다. 이 얘기로 마음이 따뜻해지신 분이 계셨는가 하면 목사가 악마 사단이다, 예수가 아닌 부처를 믿는 목사라느니 어쩐다느니 그야말로 입에 거품을 문 무뢰배들을 상대해야 했었다.
어떻게 누가 제보하여 신문에 알려진 뒤 격려전화는 한통 없이 항의 전화, 협박 전화가 빗발쳤다. 이 일이 교단 총회로까지 번져 교단 소속 목사인 나는 해명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헌금 사용의 건,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발언에 관한 건... 절집에 종도 하나 없이 너무 불쌍한 사람들 같아설랑 그냥 도와준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구원 선물이 누구에게 주어질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예수님의 사랑만 실천하는 무지렁이일 뿐이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만 교단에선 이후 잠잠해졌다. 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배를 쥐고 웃으셨다. 목사 쫓겨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대한 불교 태초종’ 종정이나 할라요, 하면서 따라 웃었다.
세상이 왼통 불통이란다.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 불 자를 써서 불통이라면 좋겠는데, 그런 불통이 아니라 꽉 막힌 불통, 인정사정 안두는 불통이니깐 문제지. 예수님과 부처님이, 교회와 절집이, 목사가 스님이 마음으로 나누는 통할 통자를 본받아 세상이 좀 통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오늘도 들리는 소문은 불통 뿐이로다. 풍선을 전라도에선 불통이라 부른다. 바람을 불어 넣어 하늘로 띄우는 그 불통이어야 하는데, 공안 바람, 민영화 바람, 혹한을 예고하는 추운 바람 말고는 그냥 꽉 막힌 불통 그 자체다.
오늘도 해남 미황사엔 엄마 종이 산사 가득 웅숭깊게 울릴 것이고 강진 남녘교회에선 아기 종이 가난한 마을을 끌어안으며 선하게 울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십년도 넘게 두개의 종이 세상을 맑히고 또 밝히고 있음이렷다. 그 둘이 엄마와 아기, 모자 지간인 걸 아는 이는 그닥 많지 않더라. 이 글을 읽고 또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생길까봐 겁부터 생겨난다. 아무 죄 없는 남녘교회 찾아가서 아기 종을 끌어내릴까봐 두렵다. 미황사 범종에다 락카 스프레이를 뿌리는 광신도가 있을까봐 나는 두렵다. “희망의 나라로 갈테야” 슈루룩 날아가는 희망의 불통, 파랑새 닮은 풍선 불통을 나는 바랜다. 마음을 겹겹이 닫아 건 불통, 귀를 막고 도무지 듣지 않는 불통, 이기와 오만으로 바리게이트를 친 불통의 시대는 제발 물러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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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녘교회 목사. 지금은 광주정신의 예술적 승화를 위해 세워진 <메이홀> 관장이며 담양 수북 산골짝에 낮게 엎드려 산다. <참꽃 피는 마을>, <앵두 익는 마을>, <사랑>, <종소리>, <예수 동화>등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