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손을 잡아라
예수의 족보에는 여자 네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문제투성이 인물들이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스캔들로 난리풍파를 일으켰고, 라합은 기름진 사내들에게 웃음을 파는 기생 출신이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닌 변방 이방의 여인으로 갑자기 등장했고, 미모의 귀부인 바쎄바는 어찌되었든 간통의 주인공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던 왕을 똥친 막대기 신세로 만들었다. 산에 좋은 나무는 일찍 잘려서 집을 깔끔하게 마감짓는 서까래 목재로 쓰이지만 끝내 산을 지키는 나무들은 못생기고 뒤틀린 나무들이다. 그렇게 못생긴 나무는 수십년 비바람 속에서 산속 도량을 지키다가 베어지면 밑동은 대들보 기둥으로 귀히 쓰인다. 못생긴 나무라야 산을 지키고, 집의 가장 중요한 받침목이 된다는 얘기다.
숲의 경계는 덤불들이다. 덩굴이나 가시 식물들... 이 가시들 때문에 사람이나 큰 짐승이 범하지 못한다. 생태학자들은 이 경계를 가리켜 임연부(林連部)라고 부른다. 숲의 주변이 되는 이러한 덤불이 많아야 산이 살찐다. 성서에는 덤불과 같은 존재들이 무수히 많다. 이 덤불들이 만약 없다면 연꽃 봉오리 예수의 복된 공생애가 있을 수 없었으리라.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봤을 때 실패자들 일색이다. 멀리 갈 것 없고 예수는 미혼모의 아들이요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갈릴리 촌놈으로 살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대표적인 실패자다. 그런 실패자의 핏줄에는 다말과 라합, 룻과 바쎄바의 피가 내리 흐르고 있는 것이다.
문제투성이 인간임을 자인할 때 성서의 주인공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그 시로 의지한다. 존 레넌의 노래 가운데 이런 노래가 한곡 있다. “얘야 눈을 감으렴. 무섭지 않단다. 괴물은 가버렸다. 그놈은 도망가고 아빠가 여기 앉아 있단다. 아름답고 귀여운 소년아. 잠들기 전에는 기도를 드리는 거란다. 매일 여러 가지 일을 참 잘해내고 있구나. 먼 바다를 건너는 여행과 같은 인생. 기다릴 수만은 없어 서두르는 걸. 네가 어른이 되는 일 말이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참아야 해. 인생은 길고 고생스러운 여정이란다. 정말로 긴 여행이다. 하지만 길을 건널 때에는 아빠의 손을 잡으렴. 인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란다. 무언가에 열중해서 주위를 둘러볼 수 없을 때는 꼭 아빠의 손을 잡아라.”(Beautiful Boy)
세상이 두려운 아이가 아빠의 손을 성큼 붙잡듯 성서의 주인공들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매달린다. 지친 개가 컹컹 달을 물어뜯는 늦은 밤에도 두렵지 않은 것은, 콜록콜록 기침으로 파묻힌 깊은 밤을 견딜 수 있는 살 부비는 가족, 위안이 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한다고, 사랑한다고, 나를 믿으라고, 어서 내 손을 잡으라는 가슴 먹먹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대는 시방 들리지 아니한가.
아버지의 손을 붙잡은 그대 손가락은 발밤발밤 뜨겁지 아니한가. 시고 달착지근하고 말랑말랑한 감귤과 같이 손바닥에 가득 붙잡힌 아이의 손. 하나님은 이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실 분, 우리들의 아버지.
서늘한 견성의 언어들 속에서 나는 인자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가려듣는다. 예수는 하나님을 한사코 아버지라 불렀다. 이런 호칭은 전에 없던 표현이었다. 빛들의 아버지(약 1, 17)였던 그분, 고아의 아버지였던 그분(시편 68, 5)이 이제 예수에게서 핏줄 아버지로 불린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다.”(요 5, 37),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 10, 30), “아버지가 나를 보냈든 나는 너희를 보낸다” (요 20, 21)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길은 아버지의 정의로운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준행하는 삶이렷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은 아버지의 정의를 능가하는 것이어야지 아버지를 부정하고 거역하고 폄훼하는 행보가 아니다. 그래 우리는 자발적인 가난으로라도 최소한 실패자의 곁에 친구로, 공동체로, 교회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만과 자만을 꺾고 세상 편으로 실패를 무릅씀이 아니고서는 영적으로 절대 성공할 수 없음이다. “자발적인 가난은 영적인 완성인 사랑의 길을 가는데 장애물들을 치워준다. 기본적으로 사랑을 이루는 핵심인 정의를 보존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우리의 이웃, 노동자들, 최하의 생활조건 속에서 현대화의 무한정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노예처럼 상품을 끝없이 생산해내는 노동자들에게 죄를 짓지 않는 적극적인 한 방법이다. 또한 자발적 가난은 침묵하는 공범자가 되지 않도록 책임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물론, 채워지지 않는 탐욕에 이끌려 노동자들의 피를 말리고 있는 대기업의 소수 주주가 되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월리엄 고사트 <자발적인 가난, 자유에의 길>에서)
비인간적인 노동에 항의하고 인간답게 사는 길을 택하는 것, 천심(天心)을 담지한 시민의 힘을 굳게 믿고 함께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는 길이다. 그대는 시방 누구의 손을 붙잡고 있는가. 뱃살 기름기 좔좔 흐르는 수억대 과한 연봉과 부패와 성스캔들이 자랑거리인, 그쪽 방면으로 성공한 목사들과 잡은 손을 냉큼 놓기 바란다. 외롭고 후미진 가난 속에서 서러운 얼굴을 짓고 있는 친구의 손을 잡고,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 그러면 하나님도 당신의 아버지가 분명 되어드릴 것이다.
불교라는 친구
아시아교회협의회 친구들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스리랑카 성공회 감독이 들려주었다는 찬송가. “나무 나무 내뭄카름. 나무 나무 미듬카름. 나무 나무 쏠라크름. 나무 나무 띠에크름... 성부성자성령 아버지이신 하나님! 임금이신 아들에게 존귀와 영광 있으라” 불교의 염불과 같은 이 노래를 부르며 감독은 “훌륭한 스리랑카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크리스찬이 될 수 있다”면서 토착화 열정을 소개하자 변선환 선생은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단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 15)는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며.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안겨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역시 불교,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들이렷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걸림돌은 바알제불(눅 11, 14)이지 결코 아미타불 부처님이 아니다. 기복적인 민간신앙으로 퍼진 바알제불이나 어떻게 대처해볼 일이지 쓸데없이 절집에 찾아가 애먼 땅밟기를 하다니... “내가 바알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면 너희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냐? 바로 그 사람들이 너희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당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예수만의 기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위 축귀 기적쯤은 예언자라면 누구나 기본으로 탑재해야 하는 비장의 무기런가. 예수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다른 종교도 아니고, 악귀 악령도 아니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몹시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예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기를 쓰며 노력 중이었다.(눅 11, 53-54) 이 구절에 붙인 국제가톨릭성서공회의 주석을 읽어보니 “예수께서는 당신 길을 가면서 낡은 구조의 주인들의 정체를 폭로하신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외면하고 자기네 악행과 도둑질을 숨기려고 거짓된 신심의 온갖 외적 실천 뒤로 피신한다. 법률 전문가들은 학문의 열쇠를 쥐고서 법률을 자기네 이익에 맞춰 해석한다. 이렇게 그들은 백성을 이념적으로 통제하고 변혁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는 행동은 이렇게 백팔십도 딴판인 것이다.
나는 가끔 그런 말을 하는데 이웃종교에 관대하고, 배려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그저 상식이라고. 한국에선 그 상식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형편이다. 사회학적인 이해로 보아 진보란 좌파 사회주의 사상과 연민어린 복지의 확대 실천을 가리킴이다. 그런 노선을 걷는 것이 기독교 진보라면 진보이지 불교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건 그저 보편타당한 시민으로서의 상식 정도다.
나는 남녘교회를 하면서 아마 한국 교회에선 처음일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에 축제를 공동으로 벌이고, ‘무등산 풍경소리’라는 산사 음악회를 조계종 증심사와 같이 진행하며 환경운동이라는 공동선에 힘을 보탰다. 무등산 풍경소리는 지금도 매달 음악회를 갖고 있는데, 벌써 88회라니 감회가 새롭다. 사회와 진행을 맡고 있는 후임 목사 친구가 고생이 참 많았고, 스님을 비롯 불자들의 따듯한 배려와 원불교, 천주교의 다정한 동행도 눈부심 그것이었다.
지금은 하늘나라 별이 된 내 친구 일철 스님은 목사가 교회도 아니고 절집에서 활보한다는 주변의 트집에다 대고 “친구가 하는 일이 곧 내가 하는 일이다”라고 못박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천 개발이다 등산로 확충이다 닥지닥지 촌닭을 삶아 파는 평상집들로 실개울까지 더렵혀졌을 것이다. 광주 시민과 전라도민들의 어머니 산 무등산은 이제 온전히 안식을 누리며 초록의 향내로 평화롭다. 증심사의 다음 바통을 이어받은 진화 스님은 명진 스님에 이어 봉은사 주지로 살고 계시는데, 가끔 내 전시회를 찾아주시곤 하신다. 초록별을 사랑하는, 잊을 수 없는 귀한 인연들이다.
남녘교회에 있는 종각은 해남 미황사에서 선물해준 것이다. 언젠가 이웃한 친구 사이인 미황사에 범종불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있을 수 없어 교인들과 상의하여 성령강림주일 헌금을 드렸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갈라디아 6, 1) 그날 내 설교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산사에 울려퍼지는 종소리나 마을을 깨우는 교회의 종소리나 새들이 다정하게 듣고 새벽과 저녁을 알리는 소리로는 별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산사의 기도가 교회의 박멸을 목표로 한 기도는 아닐 것이다. 세상이 보다 따뜻하고 윤기 있으라는 촌로들의 간절한 기도에 다름 아니리라. 미황사 주지를 맡고 있던 금강스님은 나에게 “범종불사하면서 남은 돈이 행여 생기면 고장나 못쓰고 있는 남녘교회 종을 새로 달아드릴께요. 내가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약속은 지켜졌다. 스님과 불자들이 교회 종각이 새로 세워지던 날 같이 축하의 떡을 나누고, 예배 시간에 찾아와 함께 하나님 앞에 기도를 바치기도 했다. 평화의 기도, 사랑의 기도를 말이다.
종교 편향 논란, 종교 갈등 문제가 표면 위로 드러나면서 지금 한국사회는 보다 더 시끄럽고 어지럽게 되었다. 불교라는 친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배타심으로 가득 찬 개신교 일부 세력들은 자기가 지금 어떤 무서운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모양 같다. 종교 간의 갈등, 배타와 배제의 시각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원으로 기본 상식에 어긋남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가슴을 가르고 편을 가르고 두 조각으로 쪼개고 말 천하의 악한 칼부림이다.
근본주의 수렁
‘악의 축’ 발언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바 있는 개신교 우파 근본주의는 미국의 부시 정권의 집권 이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부시 정권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민주주의 가치 퇴보나 공영의 윤리 실종으로나 최악의 참상을 절절이 보여주었다. 다양성, 포용성을 부정한 채 일방통행의 독재자에게나 어울리는 지저분한 세마포는 그들의 회칠한 무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결국 사라지나 싶었다. 그런데 시방 극동의 한국 땅에 뒷북치는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으니 참말 답답하고 한심하기가 짝이 없구나. 현대판 근본주의자들은 예수의 해방하는 가르침과는 딴판인 율법주의자들과 외식하는 서기관들의 행보와 어쩌면 그렇게도 빼닮았는지. 근본주의가 만개하기 시작한 건 레이건 정권 때 부터였다. 뼛속까지 보수우파에 물든 일부 엉터리 목사들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전쟁반대 평화운동, 흑인 민권운동, 환경 생명운동>을 싸잡아 공산주의 행태라 지목하고, 이를 물어뜯는 설교들을 남발하며 입지를 세워나갔다. 이민사회에서 급속히 유입되는 유색인종이 행여 작은 이익이라도 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하류층 백인들을 부추기고 우파 테러를 선동했다. 교회가 보수 지배층의 세세광영에 딸랑이 노릇을 자처하자 주류 보수층에선 이런 목사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충복으로 삼아 부리기 시작했다. 영향력이 확대되어가자 재미를 붙이게 된 목사들은 정치집단화 모습까지 띠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도 이를 본 따서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이 생겨나기도.
지성이고 이성이고 간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서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겠다는 축자영감설, 군사주의 강화와 무대뽀식 도발을 비롯한 타종교(특히 미국에선 이슬람교를 지목)에 대한 탄압의 배경에는 언제나 기독교 우파 근본주의자들이 저승사자처럼 서 있고는 한다. 그들은 사회복음운동이나 진화론 수용 과학관에 맞서 ‘원숭이 재판’으로 유치하고도 무식하게 멱살잡이를 해대기 일쑤다.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꿰찬 방송 설교에선 무당 푸닥거리는 저리가라 기복신앙을 퍼트리고, 기득권의 영세불망 무너지지 않는 장악력의 옹위와 호의호식에 도취한 무뇌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쁘다. 성장 성공 가도로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맘몬 하나님을 믿으라 강조한다. 중동 오일 머니를 짓누르고 미국 달러의 패권을 위하여 근본주의 목사들은 이렇듯 똘똘 뭉쳐 다녔다. 따지고 보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보다 훨씬 전쟁을 좋아하고, 맹신 행태를 보이는 자들인데 말이다. 한국 개신교는 미국에 그 뿌리가 깊고 어떻게든 우산아래 놓여있는 신세다. 장로교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유학파들과 흠모 동경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할 정도일 친미 딸랑이 목사들이 주동이 되어 한국 개신교는 지금 심각한 해악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종교는 풍부한 상징이 존재할 때, 상징의 갖가지 해석으로 보다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축자영감설의 근본주의는 모든 상징을 냅다 파괴하고, 성서 자체가 문자 우상으로 군림하여 사랑이 아니라 폭력으로 돌변하고 만다. 축자영감설이란 수렁에 빠진 개신교 교파는 그래서 수십 수백개 교단으로 분열하기 십상이고, 서로 원수가 되어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 일반사다.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니 모두 적이요 사탄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일 게다. 그런데 이 사랑의 상징들이 사라지고 배타성, 차별성, 우월성만이 강조되면 사회갈등은 뻔한 후폭풍일 것이며 더 이상 예수 복음은 인류와 겨레의 희망일 수 없다.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 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요한 5, 39) 우리에게 예수 그분은 풍부하고 풍성한 이야깃거리다. 그분의 사랑을 누가 다 측량하며 헤아리랴. 근본주의 기독교는 '안다'는 것의 강조가 지나치다. 알아도 자기만 알고, 믿어도 자기식대로만 믿으라는 으름장이요 선전포고다. 아무리 성서를 파고들어도 우리가 어찌 성서를 다 알고 이해한다 말할 수 있으랴. 예수를 만나게 되면 성서는 낱낱홀홀 쉽게 풀리고, 복음은 간단한 언술이며 사랑은 날로 깊고도 넓어진다. 예수는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은 분, 우주를 휘도는 허허로운 바람과 같은 분. 사람이 본래 천길 만길 갈래길이 아니런가. 그래 천천히 알아가고 정들어 가는 겸손한 평화주의, 에큐메니칼 연합과 연대의 울창한 복음이 우리 안에 되살아날 것이다. 예수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소박한 풀꽃하나 피우지 못할 전쟁터를 만들지 않으려면 친구여, 예수를 천천히 알아가는 풍성한 지혜로 우리네 정원이 봄날처럼 활기차기를...
살진 송아지
그러잖아도 어수선한 시절에 구제역이라는 돌림병으로 날마다 불쌍한 소들이 생매장 당하고 있다. 과도한 육식 문화, 비위생적이며 동물학대에 다름 아닌 집단사육 시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전염병은, 또 줄초상은 쉬이 막을 내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성서엔 소가 주로 제물이나 우상숭배, 풍요로운 시절을 반영할 때 등장한다. 농경목축 사회에서 소는 번영과 번창, 다산과 권력을 상징한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출 32, 4),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행 7, 41)... 이집트의 아피스 신인 황소를 형상으로 만들어 이를 섬기라고 권한 아론의 이야기는 우상숭배의 죄목을 나열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저희가 그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느 9, 18) 그 조각품을 깍듯하게 섬겨 모셨다는데, 소가 나름 대접받고 살던 시절이겠다.
힌두교의 땅 인도에 가면 소는 여태도 살아있는 신이다. 거리마다 소들이 제 운동장인냥 자유롭게 활보하고, 누구하나 소를 괴롭히거나 때리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경우 사람보다 소가 상전이다. 이 부랑자 소들은 윤회의 고리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다니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 의아하기도. 아무튼 소는 인류와 함께 지내온 나름 반려동물이나 마찬가지렷다.
초기 이스라엘인들은 기원전 120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산간지방에 거주하며 목축과 농업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네게브 고원지대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살펴보면 소와 양과 염소를 목축한 증거들이 보인다. 이들은 사막의 베두인족처럼 천막을 치고 야영 생활을 꾸려갔다. 그러다 점차 이동 생활을 포기하고 네모로 된 돌집을 짓기 시작하는데 서쪽 지역에 정착한 원주민들은 올리브나 포도 농사를 주로 짓는다. 그러나 유목에서 농업으로 전환하게 된 뒤 생활이 윤택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불안정한 정치, 반복되는 전쟁은 생계 터전을 짓밟히고 다시 일어설 수 없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금 목축 붐이 일게 되었다. 다만 그들은 돼지를 키우는 일은 없었다. 해안지방인 블레셋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겨레의 정체성을 돼지고기 금지로 분명히 했다.
돼지 대신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과 염소와 살진 소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훌륭하게 정착하여 성공한 사례로 번창한 소떼를 우선 꼽았다. 소떼와 양떼, 풍작의 농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신년 소망이었으리라. 이집트는 강우량과 상관없이 나일 강에서 농업용 물을 끌어와 쓰는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었는데, 가나안땅에선 강우량에 따라 한해 농사가 흉풍년이 갈렸다. 심각한 가뭄이 들 때는 이집트로 피신해 동쪽 삼각주 지방에 정착하여 연명하기도 했다. 소를 한 마리 이상 키우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소박한 백성들에게 중동아시아의 정세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예수는 잃었던 아들 비유에서, 집나간 아들이 살아 돌아오자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라며 성대한 쇠고기 잔치 이야기를 꺼내 들려준다. 큰아들은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짜증을 버럭 냈다. 죄인을 용서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초대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 주류 종교인, 권력자들의 경직된 태도를 비꼰 이야기겠다.
소가 귀할 때 소는 이처럼 이야기 속에서도 대접을 받는데, 소가 흔해진 지금은 소의 수난시대라 아프면서 짠하다. 당시 구제역이 창궐했다면 아마 예수의 비유에서 송아지는 송두리째 사라졌을 것이다.
이솝 우화에서 소는 우직한 참을성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자에 쫓기던 소가 굴로 급히 피했는데 염소들도 미리 피신해 있었다. 굴이 비좁아 염소들은 뿔로 소를 밀어내려 시도했다. 그래도 꾹 성질을 눌러 참던 소가 하는 말 “내가 이리 참고 있는 건 너희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밖에 으르렁대는 사자가 무서워서 참는 거다.” 소가 눈을 꿈벅꿈벅 거리면서 염소들의 뿔 박치기를 견뎠는데, 누렁소의 이 한마디 말에 염소들은 순간 뻘쭘해지고 말았다.
-----------
임의진은 목사이며 시인, 화가다. 남녘교회에서 10년동안 지내다가 지금은 담양 병풍산 골짜기에 은거하며 가끔 여행을 떠난다. <참꽃 피는 마을>, <종소리>, <예수 동화> 등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