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꺠춤 임의진, 떠돌이 별이 머무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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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 칼럼] 작은 것이 아름답다/ 녹색연합 작아 창간기념호 2011년 6월호
글쓴이 : master 날짜 : 2011-05-27 (금) 15:41 조회 : 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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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임의진(시인)
 
 
백합, 꽃의 날
 
짙은 눈썹이 애벌레처럼 보이는 화가 프리다 칼로. 그녀의 평생 사랑이었던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기억하나요. 디에고가 그린 ‘꽃의 날(Dia de la Flor)’은 멕시코 여행하면서 작은 타일에 담겨있길래 냉큼 사들고 왔죠. 백합 한 짐을 진 꽃장수가 두 손을 기도하듯 포개고, 아이를 업은 원주민 여인과 머리를 길게 땋은 젊은 아가씨까지 서로 마주보며 둘러앉은 그 따뜻한 그림. 오늘 아침 산골짝 내 작업실은 딱 그 그림 풍경이네요. 밤새 마당에 백합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하고 반... 일제히 피어나기 시작했어요. 눈시울 적시도록 황홀한 백합 향기, 온 집을 휘감는 향기는 어질병이 날만큼 아찔하군요. 이 작은 꽃이 장하게도 울도 담도 넘어서서 동네를 향기의 도가니로 물들이고 있어요. 어떤 향수가 백합향기를 따를 수 있을까요. 어떤 과학자와 기술자가 있어 검정 비닐봉지에 이 향기를 담을 수 있을까요. 시인이란들 전부를 글로 노래할 것이며 화가란들 어여쁨의 모든 요소를 그릴 수 있을까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백합 아가씨를 와락 끌어안으면 유기농 향수가 가슴뼈까지 스며들 거예요. 당신은 아마 한동안 나처럼 어지러워서 가만 서있기에도 힘에 부칠걸요?
아주 오래 전 내가 앉은뱅이 난쟁이 꽃으로 태어났을 때, 당신은 키다리 나무 메타세쿼이아의 나뭇잎으로 달려 팔랑거렸을 때, 지극히 작고 볼품없던 내게 향기를 선물하신 일을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향기를 선물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숲의 귀퉁이에서 외롭게 머물다가 영영 사라져버렸을 운명이었죠. 그런데 당신이 가엾고 불쌍한 처지의 내게, 세상에서 가장 향기롭고 가장 달콤한 향기주머니 하나를 달아주시라고 하느님께 날마다 간청하셨지요. 한 뼘이 뭐예요. 수십 미터 나보다 키가 큰 당신은 어느 누구보다 하늘나라 하느님과 가까우신 분, 덕분에 나는 향기주머니를 가지게 되어 사랑의 중매꾼 벌과 나비 천사를 불러 모을 수 있었어요. 마침내 세상의 모든 땅에 퍼트려지고, 오늘처럼 혼자가 아닌 여럿이 되어 살게 되었지요. 고마운 당신. 은덕을 한시도 잊을 수 없는 내 당신.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를 큰비와 바람으로부터 지켜주는 것도 모자라 마른 잎사귀는 거름으로까지 뿌려주시는 당신. 당신이 맡을 수 있도록 나는 더 간절한 기도로 향기를 뿜어내요. 이 향기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라 믿고 말이지요.
 
 
아기 코끼리 ‘작은 꼬리’
 
엄마는 엉덩이부터 귓불까지 너무나 큰 게 많아요. 엄마가 걸을 때는 지축이 흔들려요. 뒤뚱뒤뚱 오리들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거대한 우리 엄마. 하지만 나는 꼬맹이니까 돌멩이만큼 작아요. 오리들이 나를 떠밀면 넘어지기도 하고, 원숭이 할머니가 털도 없는 내 몸에서 벼룩을 잡겠다고 나설 땐 너무 무서워서 데구루루 구르면서 달아나지요.
서커스단 포스터는 눈물로 얼룩진 편지처럼 구겨지고 있어요. 손님들은 불쌍한 우리 엄마를 좋아라며 구경해요. 엄마는 오로지 나와 둘이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고생을 참아내요.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본 텔레비전 프로 <동물의 왕국>의 아프리카나 인도의 풀밭까지는 기대하지 않아요. 자유롭게 쇠고랑을 끊고 엄마랑 행복하게 여행을 가고 싶어요. 눕고 싶은 진흙땅에서 목욕도 하고, 걷고 싶은 유채꽃밭을 맘껏 쏘다니고 싶어요. 하지만 서커스 무대가 아니면 내내 쇠창살에 갇혀 살아가는 신세죠. 여기서 이렇게 묶여 살다가 죽게 될 운명이라고, 갈색 목도리 사자 할아버지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엄마처럼 키가 커가고 몸집이 불어나는 게, 어른이 되는 게 정말 두려워요. 등덜미 목덜미에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는 거 힘들고 괴로울거예요. 마술사는 검은 천 조각을 뒤집어씌울 테고 나는 앙다문 입술을 하고 무대 위를 빙글빙글 맴돌다가 박수를 받는 것, 아- 생각만 해도 싫어 싫어.
사람들이 나를 만지면 엄마는 불벼락처럼 화를 내면서 우워워워 소리쳐요. 혹시 나를 괴롭히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지요. 내가 보는데서 엄마를 때리기도 하는 성질머리 고약한 사육사 아저씨. 행여 천방지축 까부는 게 장기인 나를 귀찮다며 때릴까봐 엄마는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내 곁을 지켜줘요. 눈물 많은 피에로 아저씨가 그러셨지요. 어른이 되는 마법에서 어느 누구도 풀려날 수 없다고. 피에로 아저씨 눈물은 바로 그래서래요. 되고 싶지 않은 어른이 되어버린 것. 나도 곧 어른이 될 거래. 내내 이렇게 키 작은 철부지 아이이고 싶은데... 아빠의 작은 꼬리를 닮았다고, 원숭이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 ‘작은 꼬리’로 말이예요.
유랑서커스단 식구들은 모두 나를 ‘작은 꼬리’라 불러요. 내 귀가 잘생겼다고 엄마는 ‘예쁜 귀’라는 이름을 짓고 싶었는데, 서커스단 동물들 중에서 제일 어른이신 원숭이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라 엄마도 어쩔 수 없었대요. 아무리 몸집이 커가도 내 이름은 작은 꼬리예요. 나는 내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우리 아빠를 기억하는 열쇠니까요. 엄마가 그러셨어요. 아빠도 나처럼 다른 코끼리보다 꼬리가 한 뼘은 더 짧았대요. 돌아가신 아빠를 생각하며 나는 자랑스럽게 오늘도 작은 꼬리를 흔들어요.
 
 
구럼비 바위언덕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어쩔 수 없는 경우라고 말하지 마요. 죄고만 돌덩어리들 주제에 까불지 말란 소리 정말 하지 마. 나를 바수는 저 굴삭기 부대 앞에 그만 포기하라고 항복하라고 이미 졌으니까 받아들이라고 입막음하려 들지 마요.
내가 제주도 강정마을 구럼비에 살게 된 게 그러니까 수 만년 수수만년. 당신 엄마의 엄마이고 당신 아빠의 아빠이고 당신 할머니의 할머니고 당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야. 탐라국의 수군은 내 너럭바위에다 가죽 천을 말리고 돛바느질을 했어요. 목수 병정들은 나무를 깎아 들고 산아래로 내려와 ‘구럼비바당’에서 배를 만들었지요. 오키나와섬 류쿠 해적이 몰려왔던 해, 돌고래떼랑 큰 파도 태풍이랑 힘을 합해서 해적선을 아주아주 먼 바다로 밀어버렸지요. 그 날 어찌나 통쾌하던지. 맞아 맞아. 삼별초 군대도 잊을 수 없군요. 수심보다 더 깊은 수심에 땅바닥이 푹 꺼지도록 한숨뿐이던 그들. 장꾼들이 사라진 해변마을에 식어버린 가엾은 국밥 같던 사람들을 낱낱이 기억해요. 일본제국 해군과 미군정 해군이 서귀포항과 제주항, 애월항, 성산포항 도처에 정박하던 그 해엔 나라를 잃은 설움을 같이 맛보며 갈매기와 파도랑 셋이서 끼룩끼룩 울던 날이 있었지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역사를 당신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서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줄곧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도 뛰놀 수 있는 제주에선 보기 힘든 바위해변을 잘 간직하면서 말이지요.
그런 나를 바수는 저 굴삭기들. 남의 나라 군대도 아니고 내 땅 내 나라 해군이 느닷없는 날벼락같은, 시꺼먼 전쟁기지를 건설하겠다네요. 평화의 섬이라고 처음부터 이름을 붙이지 말던가 말이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쁜 일, 악한 일을 해본 기억은 드문 거 같아요. 있다면 내게 왔다가 물바위에 미끄러진 아이들 몇 무릎 조금 까진 일, 가난한 좀녀(해녀)에게 소라와 조가비를 많이 가져다드리지 못한 정도... 다만 그 뿐. 깎아지른 벼랑도 없으니 누구 하나 떨어져죽은 목숨도 없었다구요. 사시사철 밤이건 낮이건 꽃들이 연달아 피어나고, 바닷가인데도 맑은 샘물을 퍼 올려 목마른 여행자를 목축인 착한 일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해 4월 3일 그 뜨겁던 불꽃하루, 해변으로 도망쳐온 가난뱅이 어멍 아방, 할망 하르방 꽃수풀에 감춰준 게 반란죄라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그렇다면 그런 죄는 얼마든지 앞으로도 더 지을래, 나.
구럼비낭 까마귀쪽나무가 만개를 하고 오색 산호초들이 곰지락감지락 물속에서 꽃밭되어 피어나는 구럼비. 그런 나를 당신이 모른 척 눈 감아 버릴 거냐구요귀 막아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냐구요. 나를 제발 시멘트 구덩이에 파묻지 말아줘요. 나를 더 이상 목 조르며 죽이지 말아줘요. 내 몸을 부수고 깨고 짓뭉개지 말아줘. 부탁해요, 이렇게 대답해줘요. “게메 마씀. 귀 눈이 왁왁허우다(그러게 말이예요, 나도 귀와 눈이 캄캄해져요)”... 이렇게 다정히요. 지금 내 슬픔을 같이 짊어주고 내게 구조와 회생의 손을 뻗어줘요. 해바락풀(해바라기), 두레기(노란하늘타리), 천상쿨(개망초), 가시자왈(가시덤불), 그밖에 몬딱몬딱(모두모두) 들꽃무더기 강정마을 구럼비에 철따라 절절절 피고 싶어요. 철따라 줄줄줄 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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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수필가다. 담양 산골짝에 조용히 머물고 있으면서 글밭을 일군다. ‘마중물’ 시와 달 이름을 처음으로 지었고,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등 책들과 <여행자의 노래>와 같은 선곡음반도 속속 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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