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꺠춤 임의진, 떠돌이 별이 머무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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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녹색연합 마중물 칼럼] 혹성탈출 전날 밤쯤에 쓴 편지/ 작은것이아름답다 1월호
글쓴이 : master 날짜 : 2015-12-26 (토) 11:17 조회 : 2,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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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02_마중물

 

혹성탈출 전날 밤쯤에 쓴 편지

 

글 그림 임의진

 

외계행성에 도착한 것으로 믿은 주인공이 (배우 찰턴 헤스턴이 분한...) 해변을 방정떨며 달리다가 만난 뉴욕 자유의 여신상. 이 놀라운 비극과 맞닥뜨려 울부짖으면서 끝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핵전쟁 뒤에 지구는 파괴되고 주인이 바뀌어 털복숭이 유인원들이 왈왈대는 세상. 그렇다면 시저도 시저도 기억하시겠지. 로마 왕좌에 높이 앉았던 그 반인반신 말고 영화 ‘혹성 탈출’의 유인원 대장 시저 말이다. 동물 실험에 휘뚜루마뚜루 이용되었다가 고도의 지능과 원한을 갖게 되고 동료 유인원들을 이끌어 인간 세상에 항거한다는 유인원 우두머리.

올핸 원숭이 해란다. 해마다 달라지는 십이지신상의 차례. 혹성탈출의 급박한 전야 앞에서 유인원 시저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방사능 작달비가 내리고 매캐한 스모그가 뒤바람 쳐오는 시절. 물끄럼말끄럼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귀에 싹이 나게 경고를 했음에도 우리는 여태 무엇하고 있었단 말인가. 인류가 가고 있는 이 길. 좁게는 이 나라가 가고 있는 길이 시방 맞는 길이고 옳은 길인가. 의심하고 되묻는 일에 게을리 한다면 단박에 우린 종말을 맞게 될 것이리라. 사이비 종교의 입버릇 같은 종말 타령이 아니라. 인간성의 붕괴, 인간다움의 질문이 없는 그 자체가 바로 인류 종말을 가리킴이다. 핵전쟁의 종말, 혜성충돌의 종말, 태양의 소멸, 신화적 신의 재림을 통한 종교적 종말이야말로 뜬구름의 소리이고.

체로키 인디언의 후손인 작가 포리스트 카터의 위대한 책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보면, 살았으나 이미 종말이요 죽음인 이들에 대한 또깡또깡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몸(물질)을 아끼는 마음이 밤톨만한 영혼의 마음보다 더 커지면, 영혼은 완두콩알만 하게 줄어들었다가 그것조차 사라진다. 영혼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 할머니는 어디서나 쉽게 죽은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셨다. 여자를 봐도 더러운 것만 찾아내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서 나쁜 점만 골라내는 사람, 나무를 봐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고 목재와 돈덩어리로만 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들이었다.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데 마음을 쓰는 것 뿐이다. 게다가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 부리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 비로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영혼의 마음도 더 커진다. 할머니는 이해와 사랑은 당연히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이해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체하며 억지를 부려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주인공 꼬마 ‘작은 나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한 말씀을 얻어듣고 자랐다. 어머니인 대지의 신 모노라가 들려주는 말들, 모카 신발에 울리는 살천스러운 말들에 귀를 종긋 세우면서 자랐다. 사랑과 이해를 배우며 반듯하게 자라난 것이다.

 

많은 예언자들은 지난 수세기 우리 행성이 종말 목전에 놓였음을 소리 높여 외쳐왔다. 사이비 종말론 교주들이 두려움을 심어 한탕 해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 참된 예언자란 인간성 파탄이라는 위기를 줄기차게 경고하고, 경각심으로 삶을 환기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예언자가 없는 세상은 제동기가 고장이 난 차량과 같아서 죽음의 벼랑으로 곤두박질치게 되어 있다. 좋은 친구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선한 충고를 거절하고 무시하면 누구도 앞으로 마음을 다한 염려를 해주지 않게 되어있다. 잘한다고 좋다고 칭찬하고 박수치는 로봇 같은 ‘진실한 사람’만을 데리고 간다면 인생의 위대한 승리는 있을 수 없음이렷다.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진정 살아서, 살아있어서 귀하고 선한 영혼들의 세계를 밝혀나갈 것인가. 이 무거운 욕심보따리를 버리고, 수렁논에서 빠져나와 자유와 해방으로 덩드럭거릴 수 있기를! 넌더리나는 물욕에서 놓여나 사붓이 이 혹성을 걸을 수 있기를! 눈뿌리 아득한 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혹성에서 의초롭고 화목하게 우리 잘 살 수 있을까.

예언자들은 뻔하고 얍삽한 처세술의 말이 아니라 새롭고 신성한 말을 들려준다. 말뿐이 아니라 그만큼 새롭고 놀라운 행동을 보여준다. 그대로 누굴 복사해낸 흉내나 베끼기가 아니라 무엇인가 자기만의 독창적인 대안을 마련해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신기하고 반갑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먼저 살며, 몸으로 만들어나가는 그런 첫출발인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가 맞다. 인간 세상 예언자가 많아야 불개미 구덩이에서 희망을 찾고 어두운 우주 속에 이 별이 환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잘못 가는 길을 되돌리고, 이 혹성을 되살리는 일에 뛰어들어 지구탈출 우주선의 탑승을 하루라도 뒤로 미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얘기했지만 오늘이란 오! 늘 이랬으면 해서 오늘이라고. 오늘은 어제와 분명 다르다. 그리고 내일은 또 오늘이 되어 다른 오늘을 만끽하게 될 것이리. 하루 온종일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 하더라도 나오는 드라마가 다른 것처럼 어제 오늘은 천지격차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를 찾은 겨울 철새 흰뺨검둥오리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즐기고 있으리라. 되똥되똥 아기 오리들을 몰고 둥지를 옮기기도 할 것이고 반쯤 잠수하여 찬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릴 것이다. 물떼새와 도요새, 예쁜 옷을 차려입은 원앙이 유수지 풀섶에서 둥지를 튼 하루를 즐기고 있으리라. 그들의 오늘만큼 우리도 행복한가. 아니면 그들의 불안만큼 우리도 불안한가.

최악의 불경기라고들 한다. 어떤 이는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먹고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 말이 맞는 말이다. 왜냐면 그때보다 더 양극화가 심해졌고, 무엇보다 인간성이 황폐해져 버린 것이 사실이니까. 세월호는 아직도 ‘쏘리 크리스마스’. 몇 해 째 길거리에 방치되어 있는 저 사건은 인간성 파탄의 실증이다. 이게 과연 따뜻한 피가 도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가능이나 한 일인가. 대체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워 희생자 유가족들의 의견을 ‘백퍼’ 들어줄 수 없단 것인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저들의 변명, 청문회는 거짓의 봉창질이었고 저들 모두 개골창 쥐새끼들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이 아수라를 틈타 해고의 칼바람이 ‘시망스럽게’ 휘불고 있다. 노동법 개악은 탐욕스런 자본가들과 보수언론, 기득권을 틀어쥔 정치인들의 꿀 바른 먹잇감이다. 해고는 곧 살인이고 살해, 학살과 같은 말인데 ‘유연한 고용환경’이라는 거짓부렁의 옷을 해 입고 있다. 이에 대한 국민적 항쟁에는 우라질 겁박을 일삼고 야멸스럽게 잡아 가두며 나라 주인에게 물대포질을 서슴없이 해댄다. 이것이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란 말인가. 젊은이들에게 이 나라가 ‘헬조선’으로 불릴만한 현실이라면 우리는 정말 종말상황 아닌가? 이불 안 활개라더니 이곳에선 불통으로 화를 내고, 밖에 나가서는 얼마나 많이 웃으시는가. 이것은 국민에 대한 능멸이다. 그래도 살만한 나라 아니냐며 외목장사하듯 국정교과서로 몰아간다고 해서 역사가 자기들 재단에 따라 어찌저찌 될 수 있는 물건인가.

 

착한 마음이 불현듯 들어 해보는 기부와 자선은 알량한 무엇이다. 아무리 착한 부자라도 마음이 금세 식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온종일 돈돈돈 하면서 살게 만든 이 세상에서 어쩌면 당연한 ‘시들기’일 것이다. 답은 한 가지뿐. 양극화를 해소하는 칼 같은 세금 정책이다. 세금 내기 싫은 부자들은 프랑스 모 배우처럼 이민을 가면 된다. 귀하게 걷어낸 세금은 철저히 관리되어야 한다. 누구 말마따나 이 나라엔 도적떼들이 너무도 많다. 사람이 온전히 사람대접을 받으며 살만한 복지시스템 정착. 실업을 최소화하고 고용을 늘리는 국가적 노력, 친환경 생태공동체를 향한 일대전환을 이뤄야 하는 시점에서 정치가 엇나가도 한참 엇나가고 있다. 자기들 밥그릇 싸움에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 따라지목숨들은 어찌 살라고 이 난장판이란 말인가. ‘친문’이다 ‘반문’이다, ‘친안’은 대안이 아니라 불안이요, ‘친박, 비박’ 따지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엇박이 아니런가. 사랑과 이해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정치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고, 친구를 배신해야 내가 잘된다고 믿는 자들이 활개치고 있다. 세상의 진화를 위해 조그만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고 자기 혼자 배 따숩게 지내면 그만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도피와 기피, 외면은 정치보다 백배 심각한 문제다.

자기 돈벌이 말고는 아무것도 세상의 진화를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죽어서 가는 지옥이 바로 이 땅이 되고 마는 것이다. 후회하건대 과거엔 아주 똘똘하고 야물고 재주가 많은 사람들을 칭찬하고 내심 좋아하였다. 총명하고 날래고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이에게 금방 호감이 갔다. 그래서 벗으로 오가며 살았다. 그런데 그런 친구들과 가까이 하다 깨달은 점은 그들은 자기 자신, 자기 이익 말고는 도무지 밖으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의 처세와 발전, 돈줄에만 밝았다. 세상의 어둡고 낮은 곳에 연민으로 나아갈 때조차 겉으론 절대아니라면서도 결국 몇 푼의 돈, 명함과 명망을 앞세울 때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런 이들과는 서둘러 작별하였다. 그렇게 나는 외톨이인 것 같이 되었지만 외톨이는 절대 아니다. 내 곁에는 당신 같은 이가 아직도 계시기에…

역시 그랬던 것이다. 세상 편에선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친구들의 탁월한 존재감을. 바지호주머니에 돈도 별로 없고 이른바 샤프한 재주도 없으나 손과 발이 먼저 사랑하는 사람. 가슴주머니에 연민과 눈물이 아주 많이 채워진 친구. 소소한 작은 일로도 행복을 공감하는 친구. 사랑하는 재주 말고는 뾰족한 재주가 없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읽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 문제 말고도 남과 이웃을 먼저 염려하고 배려한다. 호평을 얻으려는 알량한 자비행이 아니라 그건 생을 통 털어 올인 하는 헌신이었다. 광에 조금 있는 콩이라도 나눠 먹으려 건네고 별로 알아주지 않는 재능이라도 아낌없이 기부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결국은 서로 나누고 돕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는 이는 바로 가난한 자신들이어야 한다. 뼈품을 팔아 온정을 나누는 사람들. 찬바람머리에 이불을 당겨주며 평화로운 아침을 선물한 사람들. 동병상련 처지를 이해해주실 분들이 아직 우리 곁에 있다.

여행자 시인 황유원의 글을 읽었는데, 루마니아 사람들은 죽기 전에 가까운 지인에게 이불과 베개, 그리고 담요를 물려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살냄새가 나는 침구류. 그 속엔 꿈들도 같이 섞이겠지. 죽은 이가 꾼 꿈들까지도.

가난하고 추운 친구에게 따뜻한 이불을 물려주고 싶다. 슬프고 무서운 꿈이 아니라, 혹성 탈출의 꿈이 아니라, 이 지상을 낙원으로 만드는 꿈. 언거번거 말이 많고 시끄러우며 부잡한 세상에 어디선가 따비밭 작고 외딴 밭뙈기 하나 잘 일구는 사람이 아름답다. 그에게 푹신푹신한 솜이불을 물려주고 싶다. 두둥게둥실 뜬구름이 아닌 솜털 같은 구름을 담은 이불.

그래서 이 혹성에서 사는 날들이 행복한 기억이었으면 좋겠다. 이 나라가 우리에게 자랑스럽고 행복한 기억을 안겨주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내 이웃이 그리고 내가, 모두에게 고마운 인연이기를. 이 종말의 목전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창조해 내야겠다. 종말의 유예나 연장 정도가 아닌 새로운 출발. 인간성의 회복, 창조질서 생태계의 따뜻한 보존. 인류와 함께 사는 다른 생명체와 서둘러 화해해야 한다. “인간이 지구상에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겠지만 곤충이 사라지면 인간은 몇 달 못가 멸종할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경고는 헛말이 아니다. 하찮은 곤충은 없다. 함부로 살생해도 되는 동식물은 없다. 올해도 인류가 이 혹성에서 멸절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이 있어 작년에 무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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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은 시인, 목사다. 광주에 환경음악회 <무등산 풍경소리>를 처음 열었고, 자생력 있는 문화공간 메이홀과 2관 이매진을 개관했다. 수필집 《참꽃 피는 마을》,《앵두 익는 마을》과 같은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책, <마중물>을 비롯한 시들, <여행자의 노래>, <노르웨이의 길>과 같은 월드뮤직 선곡음반을 속속 펴내고 있다. 담양 산골짝에서 혹성탈출에 나올 거 같은 차우차우 두 마리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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